환절기 출근길에 다리가 답답하지 않도록 품이 여유롭고 선이 단정하게 떨어지는 슬랙스 셋을 골랐어요. 렉토의 WIDE FIT STRAIGHT PANTS 블랙, 아모멘토의 Men's Wool Banding Pants 차콜, 문달의 Sleek Pintuck Slacks 브라운이에요. 셋 다 허벅지 둘레에 숨 쉴 틈이 있고 핀턱이나 밴딩 디테일 덕분에 단정한 태가 흐트러지지 않아요. 요즘은 사무실 복장의 경계가 많이 유연해져서 이렇게 통이 넉넉한 슬랙스를 셔츠나 얇은 니트에 받쳐 입는 분들이 부쩍 늘었어요.
1930년대 할리우드에서는 여성이 바지를 입는 일이 괴상한 금기로 여겨졌어요. 배우 캐서린 헵번이 헐렁한 와이드 슬랙스를 고집하자, 영화사 측에서 바지를 못 입게 하려고 촬영장의 바지를 몰래 숨겨버리는 소동까지 벌어졌지요. 하지만 헵번은 물러서지 않고 바지를 돌려줄 때까지 속옷 바람으로 스튜디오를 당당하게 활보했고, 결국 영화사는 두 손을 들고 바지를 돌려주었어요.
그 단단한 기세 덕분에 옥죄지 않는 편안한 바지가 현대 정장의 클래식으로 남게 되었지요. 지금 고른 셋 중에서 차콜 색상 위주로 더 좁혀 볼까요, 아니면 10만원대나 면 소재 슬랙스로 목록을 다시 추릴까요?
↳ 10만원대로 찾아줘
10만 원대 예산에 맞춰 실루엣과 선의 결이 서로 다른 세 벌을 골랐어요. 매끄럽게 떨어지는 인사일런스의 울 세미 플레어 팬츠 블랙, 버튼 디테일에 직선적인 무늬를 얹은 마지셔우드의 스트라이프 버튼 트라우저 네이비, 그리고 옆선을 유려하게 굴려 낸 문달의 소프트 커브드 팬츠 네이비예요. 요즘 하의 목록을 보면 단순한 일자 통바지보다는 선을 비틀거나 뚜렷한 줄무늬로 입체감을 살린 옷들이 부쩍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요.
스트라이프 중에서도 분필로 슥 그어놓은 듯 번지는 초크 스트라이프는 런던 새빌로의 유서 깊은 양복점 헨리 풀과 원단 명가 폭스 브라더스의 플란넬을 만나며 영국 복식사의 상징이 되었어요. 1940년 윈스턴 처칠이 이 그레이 초크 스트라이프 수트를 입고 시가를 문 채 톰슨 기관총을 쥔 모습은 굽히지 않는 저항의 표상으로 남았지요. 영화 ‹다키스트 아워›에서 당시 옷을 복원해 다시 제작했을 만큼 지금까지도 카리스마 넘치는 옷차림으로 회자돼요.
클래식한 줄무늬나 곡선 재단 하나만 더해져도 평범한 일상복 차림 전체의 인상이 단번에 바뀌지요. 골라둔 세 벌 가운데 울 소재로만 좁혀서 볼까요, 아니면 블랙 색상이나 더 여유 있는 와이드 핏 쪽으로 넘어가 볼까요?
↳ 울 소재로만 볼래
울 소재로 지은 팬츠 셋을 골랐어요. 인사일런스 울 세미 플레어 팬츠 BLACK, 마지셔우드 CROPPED PANTS_charcoal, 문달 Mono Half Pants in Black이에요. 울은 특유의 보온성도 좋지만 섬유를 가공하는 방식에 따라 아래로 떨어지는 무게감과 태가 완전히 달라지는 원단이지요.
고대 로마 시대에는 '풀로니카'라는 작업장에서 모직물을 더 촘촘하고 단단하게 만드는 축융 가공을 도맡았어요. 비누가 없던 시절이라 알칼리성 암모니아로 양모의 기름때를 녹여내고, 일꾼들이 커다란 세탁통 속에서 몇 시간 동안 맨발로 양모를 밟아 섬유를 엉키게 했지요. 폼페이 세탁소 유적에 남은 벽화에도 통 속에서 쉼 없이 발을 구르며 품격 있는 토가용 옷감을 다듬던 노동의 흔적이 그대로 그려져 있어요.
그렇게 단단히 매만진 울이라도 길이에 따라 느껴지는 분위기는 전혀 달라요. 발등을 차분하게 덮는 풀 랭스부터 경쾌하게 무릎을 드러내는 하프 팬츠까지 다 모여 있어요. 긴 기장으로만 좁혀 볼까요, 하프 팬츠로만 볼까요, 아니면 20~30만 원대로 맞출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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